환난에 처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소망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2절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을 살펴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연관이 깊은 서신서입니다. 이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은 바울 일행이 박해로 인해 짧은 기간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 직후에 2차 전도 여행으로 마게도냐의 빌립보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3주간에 걸쳐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기해 폭동을 일으키자 바울은 베뢰아를 거쳐 남쪽의 아덴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덴에서 그는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 속히 오게 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상황을 알고 싶어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으로 파송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린도 지역에서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감사하며 몇 가지 권면의 메시지를 담아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가장 먼저 쓴 서신으로, 종말론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울은 두 번째 편지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시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교사, 이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인해 생업을 포기하고 무위도식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시 편지를 쓴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의 말씀에서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같이 성도들에게 먼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감사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진보했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도 소망을 놓지 않고 인내하고 신앙을 지킨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습에 기뻤던 것이죠.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찾아온 모든 박해와 환난을 인내하며 믿음으로 견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지속되면 그들이 언제 그들의 믿음을 저버릴지 알 수 없었고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된 신앙에 빠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이 격려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떤 소망을 품도록 하였을까요?
첫째, 고난을 안식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6~7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중 하나였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리아에서 로마까지, 나는 육지와 바다에서 밤낮으로 10마리의 표범들 사이에 묶여서 야수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표범들은 이그나우스를 호송하는 군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다 순교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행하는 그 악을 통해 나는 더욱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나는 나를 위해 준비된 야수들에게서 이익을 얻기 원합니다. … 이제 나는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다다르는 것을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 십자가, 야수와의 싸움, 찍기, 자르기, 뼈 비틀기, 사지 절단하기, 몸을 짓뭉개기, 사나운 매질,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해지도록 두십시오. 이를 통해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게 하십시오.”
초대교회에는 이런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박해에 대비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난을 구원의 소망으로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박해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박해를 당하며 견디고 인내했던 것입니다.
장차 주님이 오시는 날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보응하셔서 그에 합당한 심판을 행하시고, 환난을 당한 성도에게는 위로와 구원을 베푸셔서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초대교회와 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고난과 핍박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전할 때 당하는 핍박은 여전히 있으며 어떤 일이든 주를 위해 고난받고 핍박당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겪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는 영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구원의 복된 소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복음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말뜻 그대로 좋은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8절 말씀처럼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날,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의 소식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엄밀히 말해서 구원받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형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죄의 삯에 대한 분명한 심판의 형벌이 예정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심판의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심판의 형벌을 받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심판의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와는 반대로 심판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면 이 땅에서는 영광을 받는 대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은 장차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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